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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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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정의 (퍼옴)
가곡은 피아노 반주가 포함된 성악곡으로서 시에다 선율을 붙인 문학과 성악이 공존하는 음악예술을 한 장르이다. 한국가곡의 경우, 대략 19세기말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고, 한국에서 일본의 역할이 점차 커져 가던 시가와 때를 같이 하면서 시작된다. 그 이루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을 지나는 동안 한국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이 가곡분야도 큰 변화를 겪어왔다. 음악분야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짧은 형태를 가졌으면서도 정치와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왔을 뿐 아니라 구조의 단순함 때문인지 전문 예술인에서부터 음악애호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동으로 폭 넓은 사람을 받아온 장리이다.
1.한국가곡의 변천
1) 한국가곡의 배경
한국가곡은 19세기 말 시작된 ‘창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음악이론가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창가는 악보화 되기보다는 민속음악처럼 구전되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작시자의 경우, 전문적인 시인이 아닌 일반 지식인, 민중의 지도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대체로 창가의 선율은 기독교 예배음악인 찬송가의 선율을 차용하여 만든 경우가 많았으며, 이 찬송가의 선율들은 창가뿐 아니라 애국가, 독립군가, 항일투쟁가 등으로 변모되어지기도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외국의 민요들도 소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민요들 역시 창가, 독립군가, 항일투쟁가 등으로 불려 지기도 했다. 또한, 일본 강점기를 전후하여 일본의 창가와 민요들도 소개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개사되어 불려 지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05년 한국인으로서의 창작 창가인 김 인식의 ‘학도가’가 작곡된다. 이외에도 그는 애국가, 전진가, 국기가 등을 작곡했으며, 그와 더불어 이 상준 등도 창가의 작곡활동에 참가했다.
2) 한국가곡의 시작(1920년대)
한국가곡은 1920년경 작곡가 홍난파(1897-1945), 박태준(1900-1986) 안기영(1900-1980), 현재명(1902-1960)의 작품들로 시작되어진다.
초기에 작곡된 주요 작품들로는, 홍난파의 경우 ‘봉선화’를 들 수 있고, 박태준의 경우, ‘동무생각, ‘님 과 함께’, ‘미풍’, ‘소낙비’, 등을 들 수 있으며, 안기영의 경우 ‘그리운 강남’, ‘마의태자’,등 이며, 현제명은 ‘조선의 노래(대한의 노래), ‘니나’, ‘오라’, ‘나물캐는 처녀’,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한국최초의 가곡은 홍난파의 ‘봉선화’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 작품은 1920년 기악곡으로 발표 되어지고, 그 후에 김형준이 이 가곡에 가사를 붙여 가곡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가곡은 1925년에 발행한 ‘세계명작곡집’에 수록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이 1922년에 작곡되어 혹자는 한국최초의 가곡을 ‘동무생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초기의 가곡들은 대체로 음악적인 연결이나 작품의 구조는 서구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가사에서 풍겨지는 작품의 내용은 민족주의적이며 계몽주의적인 것이 많으며, 우리민족의 애환을 표현하고 있는 곡 또한 많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가곡들의 음악적인 면에서는 강박의 개념이 명료하지 않고, 가사와 선율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며, 반주가 선율에 종속되어 있는 점 등의 한계점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또한 이 시대의 가곡들은 그 상시 한국의 특별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남북한의 분단 상황등- 으로 인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예켠대 한기영의 경우 많은 가곡작품들을 남기고 있지만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연주가 금지되었다.(1988년 10월 27일 해금) 또한 월북시인들의 시에다 곡을 만든 가곡들 역시 금지가 되었으므로 작곡가들은 시인들의 이름을 바꾸는 방법 등으로 작품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다. 예컨대, 채동선의 가곡 ‘그리워’ 는 이은상 시로 되어있지만 본래는 정지용의 ‘고향’이라는 시에 붙였던 가곡이었다.(1988년 10월 27일 해금) 박태준 역시 이러한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에 따른 피해자로 볼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가곡작곡가 보다는 동요작곡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가곡들은 대부분 윤복진의 시를 사용하였는데, 이 시인도 월북을 하였으므로 그의 가곡 역시 역시 연주가 금지되었었다, 따라서 동요작품들만 금지되지 않고 연주되다 보니 그는 가곡보다는 동요작곡가로 더 많이 인식되어져 왔다.
3) 가곡형식의 정착(1930년 대를 중심으로)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작곡가로는 채동선(1900-1953) 이흥렬(1909-1980) 김세형(1904-1999) 김성태(1910-) 조두남(1912-1984) 김동진(1913)을 꼽을 수 있다.
채동선은 19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고향’ ‘내 마음은’ ‘바다’등의 가곡들을 작곡하였고 1937년 작품집을 발간한다. 그의 가곡은 대체로 자유시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과-시의 선택에 대해 신중했던 것으로 보임. 영문학전공 이었던 점이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김동진과 더불어 통절가곡의 장르를 개척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흥렬은 19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바위고개’ ‘자장가’ ‘코스모스를 노래함’ ‘부끄러움’ ‘봄이 오면’ ‘고향 그리워’등을 작곡하였고, 이 것들을 모아 1934년에 ‘이흥렬 작곡집’을 발간한다, 그의 가곡은 서양음악을 답습하는 수준이었던 초기의 가곡을 우리정서에 바탕을 둔 명랑하고 아름다운 가곡으로 끌어 올렸다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김세형은 1932년 길버트의 영어시를 가사로 한 연가곡집 ‘먼 길’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1938년, 한글로 번역하여 작곡집을 발간한다. 한국최초의 연가곡인 셈이다. 이 외에도 그는 ‘뱃노래’(1934) ‘바다’(1939)등의 가곡을 남기고 있다.
김성태는 1937년 ‘바다’ ‘말’ ‘산 너머 저 쪽’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가곡들은 월북시인인 정지용 시에 붙인 가곡들이라 연주가 금지되었으므로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외 가곡은 민요적인 소재를 서양음악에 접목시켜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은 서양음악의 어법에 충실하려는데 비해 그는 우리 것으로 소화시켜 한국적 예술가곡에의 방향을 모색하였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으며 이러한 노력은 이 후에 ‘산유화’ ‘동심초’등에서 그 결과를 보게 된다.
김동진은 ‘봄이 오면’(1931), ‘뱃노래’(1932) ‘가고파’(1933) ‘파초’(1934)등을 작곡했다. 그의 가곡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악상이 전개되며 서정적인 분위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채동선과 더불어 통절가곡의 장르를 개척한 점도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4) 새로운 방향 모색기(1940년대를 중심으로)
20년대의 개척기를 거쳐 30년대에 이르러 근대음악양식의 하나로 정착된 우리가곡은 40년대에 들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이 시대의 가곡들은 크게 두 가지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30년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서정적인 가곡의 맥을 잇는 형태이며 또 하나는 진보적인 동시에 사실주의적 경향의 가곡이었다. 전자의 경우 지금까지 소개되었던 작곡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후자의 경우, 새로이 등장하는 작곡가들 즉, 윤이상, 김순남, 이건우, 나운영등이 주도하였다고 불 수 있다.
윤이상은 ‘추천(그네)’ ‘고풍의상’ 달무리’ ‘편지’ ‘나그네’ ‘충무공’등 6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이 중 충무공을 제외한 5곡을 묶어 ‘윤이상 초기가곡집’ 이라는 제목의 가곡집이 윤이상음악연구소(평양)에서 출간 되었다. 남한과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연주되고 있는 가곡으로는 윤이상 곡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의 가곡들은 한국의 민속적인 선율과 리듬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장단조의 체계를 벗어나서, 자유로운 선법, 부가화음등의 사용으로 이전시대의 가곡들과는 다른 실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순남은 많은 가곡작품을 남겼지만 월북 작곡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다. 1947년에 ‘산유화’ ‘바다’ ‘그를 꿈꾼 밤’ ‘있었던 마음’ ‘초혼’의 다섯 곡을 작곡하였고, 1948년에 ‘진달래꽃’ ‘상열’ 탱자’ ‘양’ ‘철공소’ ‘자장가’ 등 여덟 곡을 합하여 13곡을 남기고 그는 월북했다. 그의 가곡은 현대적인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세련미가 넘친다. 초기가곡에서 보였던 피아노의 빈약함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한국적인 선법을 바탕으로 한 선율과 화려하면서도 선율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피아노와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그는 서양음악의 어법을 극복하여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한 작곡가로서, 특히 전동음악적인 재료를 서양음악의 구조에 결부시키려고 노력한 점이 두드러진다.
이건우는 김순남과 마찬가지로 월북 작곡가이다. 1948년 5월 ‘금잔디’ ‘붉은 호수’ ‘가는 길’ ‘엄마야 누나야’ ‘산’을 작곡하였고, 11월에 ‘자장가’ ‘꽃가루 속에’ ‘소곡’ ‘추풍령’ ‘산길’ ‘빈대’등 11곡을 작곡하여 발표했다.
이중, 나중에 작곡한 6편의 가곡은 아직도 해금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것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작곡한 작품들에 한해서만 해금되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가곡작품은 김순남의 가곡에서 보였던 특징들이 거의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현대적인 기법으로 되어있으면서도 선율의 세련된 모습, 피아노반주의 현란한 모습 등이 두드러진다.
나운영은 1939년 가곡 ‘가려나’ 로 동아일보주최 신춘문예 작곡부문에 입상하면서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이후 ‘박쥐’ ‘달밤(1947)’ ‘가는 길(1947)’ ‘별과 새에게(1948)’ ‘접동새(1950)’ 등의 가곡을 쓰고 있다. 그의 가곡은 처음에는 다소 낭만적인 분위기로 시작되나, ‘접동새’에 이르면 한국적인 가곡의 표본이 될 만한 실험을 보이고 있다. 피아노는 거문고산조와 장구장단을 빌려왔고, 노래부분은 남도 판소리의 요소를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가곡에 민요조의 가락을 중심으로 사용하는데 비해 그는 이 곡에서 산조와 판소리의 요소를 사용해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당시, 음악계의 국제흐름과 비교해 볼 때, 이 시대의 가곡들은 음악 면에서나 기법 면으로 국제적인 조류에 따르고 있었으며, 한국의 전통음악을 작품의 주 소재로 하고 있어서 서구의 작품들과는 구분되어지므로, 이 시기에 한국의 독자적인 예술가곡이 탄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이론가들도 있다.
5) 가곡 대량 생산 기 (1950년 대를 중심으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20-30대 작곡가들이 이 시대에 이르러서도 활발한 활동을 계속한다. 뿐 아니라, 많은 작곡가들이 가곡작곡에 참여하게 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들로는, 윤용하(1922-1965), 이호섭(1918-?), 정세문, 변훈,(1926-), 김순애(1920-), 김달성(1921-), 이상근 (1922 –작고),김형주(1925-), 정윤주(1918-작고), 정회갑(1923)등을 들 수 있다.(가곡 작곡을 시작한 것은 이 시기보다 이른 작곡가가 많다, 그러나 그들의 가곡작품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작곡이 되고 있어서 이 시대의 작곡가들로 구분했다.)
이 50년대의 특징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혼란한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가곡 작품 활동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 1세대 작곡가들로부터 작곡수업을 받은 제2세대의 작곡가들이 등장하고 있고, 유학 후 귀국하여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곡가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윤용하는 ‘보리밭(1952)’ ‘달밤’(1956) ‘산골의 노래’(1956) 등의 가곡을 작곡했다.
이호섭은 ‘국화 옆에서’(1955) ‘어머니의 얼굴’(1956) 등을 작곡했다.
변훈은 ‘낙동강’(1951) ‘자장가’(1952) ‘명태’(1952)등을 작곡했다.
여성으로서 첫 작곡가인 김순애는 1938년에 ‘네 잎 클로버’를 작곡하여 작곡계에 입문한다. 그 이 후 그의 작품은 다소 뜸하다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중심으로 한 1951년에만 16작품을 작곡해내고 있다.
김달성은 12곡으로 이루어진 연가곡 ‘사랑이 가기 전에’(1958)를 작곡했다.
김형주는 ‘자장가’와 ‘고요한 밤’(1949)을 시작으로, ‘낙화암’(1951) ‘고향’(1951)등 50년대에 많은 가곡을 남기고 있다.
정회갑은 ‘진달래꽃’ (1947)으로 가곡작곡에 입문한 이후, ‘음3월’(1952) ‘먼 후일’(1953) 등을 작곡했다.
이 시기의 가곡작품들은 작품의 수는 많으나, 30-40년 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서정적인 분위기의 가곡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시기는 대중과 밀접하기를 원했던 초기 20-30년대의 분위기를 다시 연상시킨다. 전쟁으로 인한 불안함, 남북한 분할로 인한 음악계의 어수선함 등이 실험적인 작품보다는 대중과 함께하기를 원하는 작품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40년대에 이루었던 한국의 소재를 중심으로 하는 실험적인 작품들의 맥이 끊어진 듯한 점이 이 시기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6) 가곡의 이원화 (1960내 이 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가곡은 일종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는 작곡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이 일어, 젊은 작곡가들이 등장하여 세계적인 추세에 따른 현대적인 기법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또한, 작품이 아무리 한국적이라 해도 현대성을 띄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음악으로 취급될 수 있으므로, 현대적 혹은 전위적인 기법을 연구하여 작품에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60년대의 가곡분야는 기법적인 면에서 점차 이원화 하게 된다.
이상근, 정회갑 그리고 백병동(1936-)등은 세계적인 추세에 따른 새로운 방향으로의 가곡작품을 작곡한다. 이에 반해, 장일남(1932-), 최영섭(1929-), 김규환(1925), 이수인(1939-) 등은 일반대중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가곡을 작곡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 한국가곡역사에서 양식적인 면에서의 중요성을 가지며, 후자의 경우 청중과의 교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백병동은 한국의 현대가곡 분야에서 가장 중심에 서있는 작곡가이다. 그는 1957년 ‘늪’과 ‘동백꽃’ 의 작곡을 시작으로 60년대에만 17편의 가곡을 작곡하고 있다. 이론가 민경찬에 의하면, 그의 가곡은 시의 서정을 노래한 현대적 서정가곡과 시의 내용을 극적으로 표출한 표현주의 가곡 등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보이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늪’ 동백꽃’ ‘남으로 창을 내겠고’ 등이 전자에 속하게 되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어둠과 시간과’ ‘화장장에서’ 등의 가곡은 후자에 속하게 된다. 그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관현악 반주의 가곡도 작곡하여 가곡의 영역을 한 단계 더 넓히고 있다.
장일남은 ‘기다리는 마음’(1951)을 시작으로 ‘비목’(1963) ‘달무리’ ‘추억’ 등의 가곡을 작곡했다.
최영섭은 ‘마을’(1947)을 시작으로 가곡작곡에 입문한 후, 많은 가곡을 작곡하고 있다. 특히 그의 가곡 중 ‘그리운 금강산’(1972) 은 KBS FM 위촉으로 작곡되었는데, 일반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장일남의 ‘비목’과 함께 일종의 국민가곡처럼 인식 되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가곡이 대중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방송매체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예 켠대, 비목의 경우 방송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사실상 이 때부터 방송매체는 한국가곡의 보급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7) 그 이후의 한국가곡
1960년대 이 후의 한국가곡분야는 너무나 많은 작곡가들과 연주가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60년대까지의 경우와는 달리 어떤 제한된 정리를 끌어내기가 어려워 졌다, 가곡작곡가들의 경우, 지역마다 각각 독립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작곡된 가곡작품들은 대체로 작곡가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등 어떤 공인된 자료 연구 센타나 연구기관이 없으므로 가곡에 관한 자료를 모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령 자료를 모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을 보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가곡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음악학자들의 경우 역시 자료부족으로 아직 체계적인 정리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중에서도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한국가곡에 대한 계속적인 연주나 연구가 필요함을 깨닫고 지역마다 연주가와 작곡가들을 중심으로 한국가곡연구회가 결성되어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다, 예컨대, 성악가들이 중심이 되어 연구하며 활동하는 ‘우리가곡연구회’ ‘한국가곡연구회’ 현대가곡연구회’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순수한 연구차원을 넘어서지 않은 전문적인 연구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단체끼리의 교류나 지역간의 교류 등은 아직은 요원한 듯하다.
KBS FM에서는 꾸준히 신작가곡을 위촉하고 연주하여 정규적으로 방송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대중성이 있는 가곡을 중심으로 CD를 제작하고 가곡연주회를 개최하고 있다. MBC에서는 한 때 콩쿨 등을 통하여 창작가곡을 활성화하는 운동이 있었으나 지금은 멈춘 상태이다. 단지 봄이나 가을철에 가곡축제를 개최하는 정도이다. 이 경우에도, 연주되어지는 가곡들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3-40곡의 레퍼토리 내에서만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송계가 주관하는 연주들마저도 최근에 이르러서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운동으로 몇 년 전부터 시인과 작곡가 연주가들이 공동으로 작업하여 신작가곡을 작곡하여 작곡집을 출간하고 연주와 음반 제작을 통하여 보급하고 있다.
‘우리 시 우리노래’ 와 현대시조시인들이 중심이 되는 ‘겨레의 노래 천년의 노래’ 들이 그 대표적이 예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으로는 (사) 한국가곡문화예술협회의 활동을 들 수 있다. 2006년 2월 사단법인 인가를 전후하여 매년마다 ‘가곡 대축제’ 를 개최하면서 이 음악회를 통하여 매회 200곡의 가곡을 엄선하고 보급 및 소개하고 있으며, 대구 부산등 지역에서의 가곡연주회 등도 계획하여 대규모로 실행하고 있다. 연주만이 아니라 원로작곡가들의 구술채록 사업과 한국가곡 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을 계획하는 등 본격적인 가곡역사정리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잇다, 특히 이 단체는 음악인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가곡을 사랑하는 여러 분야의 전문인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행보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하겠다.
3. 맺는 말과 남아있는 과제.
지금까지 한국가곡이 변천해 온 과정 중 초기에서부터 1960년대까지를 고찰하고 그 후의 한국가곡에 관하여 간단히 설명해 보았다. 종합해 본다면, 한국가곡은 1920년대에 시작되어 30년대에 하나의 음악형식으로 정착되어지며, 40년대에 새로운 실험적인 방향으로의 가곡이 나타나고, 50년대부터는 많은 작곡가들이 가곡작곡에 참여하게 되고, 60년대에 이르면 현대가곡과 대중가곡으로의 이원화 현상을 보이면서 양산체제에 돌입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가곡은 단순이 노래 부르기나 듣기를 즐기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묵묵히 적응해오는 동안 이 가곡의 역사가 바로 한국의 역사인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정치적 사회적인 면에서 지나간 과거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듯이 가곡의 흔적에서도 우리는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 이르러 이미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아름답게 각인되어있는 우수한 가곡작품들과 그 작곡가들에 대한 평가들 마저도 정치적인, 이념적인 잣대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홍난파의 경우, 한국가곡사 에서는 출발점에 서있는 중요한 작곡가이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현재 인천시에서 계속되어오던 난파음악제가 없어졌다. 그 때문인지 그의 작품연주도 다소 뜸 해진듯하다.
한 때, 정치인들이 즐겨 불렀던 윤해영 시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의 경우, 그의 친일행적과 곡의 가사의 내용이 독립군의 이야기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이 곡의 연주가 뜸해지고 조두남 기념관으로 기획되었던 건물이 마산음악관으로 바뀌는 등 큰 변화가 있기도 했다.
앞서 설명한바 있지만 1988년 해금으로 월북작곡가들이나 시인들의 작품들이 다시 연주될 수 있게끔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해금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지 않는다, 악보 상에서 시인의 이름을 바로잡고, 틀린 가사를 고치는 작업은 간단한 노력으로 될 듯하지만, 그 동안 지불되어왔던 저작권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떤 작곡가의 경우, 이미 월북시인의 유족들이 그 동안 저작권으로 받아왔던 금액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뿐 아니라 1988년에 해금 되어진 작품들은 해방이전에 작곡되어진 작품들로만 한정되어 있다.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다음의 해금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 이 후에 작곡된 작품들에 대한 해금은 언제 이루어지나?
공자와 음악예술 (퍼옴)
궁(宮,C)은 통치자를,상(商,D)은 장관들을,각(角,E)은 백성을,치(G)는 국무(國務)를,우(羽,A)는 물질 세계를 나타낸다. 이 5음계들에 무질서나 불규칙성이 없